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문단 편집) === 초년기 ===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에서 아버지 베르나르도와 어머니 바르톨로메아의 2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마키아벨리의 조상들은 나름 사업에 재간이 있어 은행업과 양모업 등으로 제법 많은 재산을 비축했었지만,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학자 스타일의 법률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재산을 불리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영향인지 마키아벨리는 종종 스스로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낮춘다. 사실 그의 친구들이 다 귀족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돈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단, 마키아벨리는 동시대의 평민보다는 부유한 생활을 했었다.] 마키아벨리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고대 철학과 역사와 시에 관심을 두었다. 12살에 파올로 다 론시글리오네의 학교를 다녔고, 20대 초중반에는 피렌체의 대학교인 스투디오(Studio)에서 공부했다. 이때의 마키아벨리는 당시 격변의 피렌체를 목격하게 된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위대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피에로 데 메디치]]'가 다스리는 군주국이었다. 하지만 피에로는 무능했던 데다가 1494년엔 프랑스의 침공으로 당시 피렌체의 영토이던 [[피사]]를 빼앗겼고, 영토상실은 피렌체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졸지에 민중의 야유를 받으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피렌체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산마르코 [[수도원]]의 원장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나섰다. 그는 종교적 카리스마와 종말론을 앞세워 귀족들을 제압하곤 민중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피렌체에 공화국을 세웠다. 즉, 피렌체는 당시 한 명이 지배하는 군주국에서 다수가 지배하는 공화국으로 정치체제가 바뀌는 격변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도자였던 사보나롤라는 스스로를 예언자라 부르면서 금욕을 통한 구원을 내세우고 지나친 도덕주의를 강요하면서 민중들의 반감을 샀고, 게다가 부패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비판하면서 [[프랑스]] 편에 섰기 때문에 교황의 분노마저 사는 등의 악수를 거듭했다. 교황은 피렌체에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금지시키는 성무금지령을 내렸고, 이에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파와 교황파로 갈라서서 서로를 비난하였다. 교황파의 [[수도자]]들은 "사보나롤라가 예언자임을 증명하려면 직접 불길을 통과하는 시험을 치뤄야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단번에 피렌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주최측의 사정으로 이 시험 자체가 무산되자 성난 군중들은 사보나롤라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